No. 106 “이해되지 않는다고 믿고 싶지 않다고”

<2018 04 01>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기독교인이나 목사라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합니다. 지금은 힘을 잃었지만 자유주의 신학자라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기절설, 환상설, 정신착란설, 시체도거설 등의 가설을 만들어 부활을 부인했었습니다. 


이들은 ‘신앙이 중요하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지, 역사적으로 예수님이 존재 했냐 안 했냐가 뭐가 중요하며,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냐 아니냐가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합니다. 해서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이 아니라 신앙이라고 설파합니다. 이들의 말을 얼핏 듣기에는 신앙 좋고 믿음 좋은 똑똑한 사람들의 말처럼 들릴 수 있지만 사실은 기독교의 기초를 허무는 대단히 잘못된 사상입니다. 


이해되지 않는다고, 믿고 싶지 않다고, 부활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믿고 싶지 않다고 해서 사실과 실체가 없어지고, 진실이 사라질까요?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들 중에도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인정하기보다는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가서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거짓말을 쉽게 믿었습니다(마 28:11-15). 이들은 믿음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사욕 때문에 자기들이 보고 경험한 것을 버리고, 자기들이 만들어 낸 거짓을 쫒았던 겁니다. 


초대교회 성도들 중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500명이나 목격했지만(고전 15:3-6), 약속하신 성령님의 강림을 기다릴 때에는 마가의 다락방에 120여명만 참석하였습니다(행 1:12-15). 이해가 되지 않거나 체험이 없어서가 아니라, 따르지 않기로 작정을 했던 겁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존재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전파하는데, 어찌하여 여러분 가운데 더러는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고전 15:12)”하고 책망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 봅시다.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이 학교에서 구구단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구구단 시험에 100점을 받았습니다. 이 아이는 의기양양하여 집에 돌아와 할아버지에게 자랑을 했습니다. 기특하게 여긴 할아버지가 손자를 시험해 봅니다. "얘야! 3x4는 얼마지?" "12입니다."  "오! 그래, 맞았구나. 6x7은?" "네, 42에요". "아주 잘 하는구나. 그러면 13x13은 얼마지?" 아이가 얼굴이 빨개지며 화가나 소리쳤습니다. "할아버지, 바보에요?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여러분! 13x13란 셈이 없습니까? 바보 같은 소리입니까? 구구단만을 배운 아이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것뿐이지, 13x13란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이해되지 않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무적의 로마 군인들이 철통같이 수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아침 굳게 닫혔던 돌문이 열렸고,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있었습니다(요 20:1,2).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살리셨기 때문입니다(행 5:30). 비어 있는 무덤만으로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로 결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해되지 않는다고, 믿고 싶지 않다고, 부활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살아 나셨습니다.